10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던 날 출근길, 평소와 똑같이 눈이 떠진다. 원래부터가 알람 소리에 기대어 깨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새로울 것은 없었다.
식구 모두가 고이 잠든 시간, 도시락을 준비하고… 아, 오늘 점심은 팀장이랑 마지막 식사를 하기로 했지. 커피 물을 끓이고, 아, 팀원들이 마지막으로 같이 커피 마시자 할 텐데… 도시락, 커피 준비 안 하니 시간이 조금 남지만, 그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다.
샤워를 하고, 모처럼 셔츠를 꺼내 입었다. 정장을 입을까 했지만, 5월의 마지막 날에 정장은 너무 덥다. 평소엔 늘 청바지 조거 팬츠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었지만,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까, 조금 예의를 갖추는 차원에서? 네이비 컬러의 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이 정도면 우리 회사에선 엄청 차려입는 거다.
차를 끌고 나오니 6시 50분. 이 시간엔 오래 걸려야 40분 정도다. 새벽마다 같은 길, 같은 속도, 같은 신호까지 걸리면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출근길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언제 다시 ‘출근’이라는 걸 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워킹맘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경력단절’이다. 새삼 느낀다. 이제 내 ‘커리어’는 끝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팬데믹 이후, 8시 출근을 한지도 어느덧 일 년이 넘었다. 남들이 출근하기 전 혼자서 개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고, 퇴근하고 6시에 아이 학원 픽업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도 집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하면, 집이 멀어 여간 걱정이 아녔다. 하지만 이제부턴 출 퇴근길에 대한 걱정은 아예 하지 않아도 된다.
8시도 안 된 시간, 사무실은 조용하다. 나는 이미 파일 정리가 된 내 피씨를 켜고, 회사 임직원에게, 그리고 팀원들에게 보낼 퇴직 인사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쏘쿨하게 ‘난 간다 좌식 드라!’ 같은 류의 메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메일 창을 여니 지난 8년이 스윽 지나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수많은 시련과, 성취가 떠오른다. 커리어의 중반에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해, 리더의 자리까지 오게 된 곳이다.
수많은 선배와 후배가 공존하던 곳.. 쏘쿨하기 쉽지 않다.
다소 진지한 전체 메일과, 조금은 울컥하지만, 의연하고자 노력한 팀메일을 어떻게든 마무리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긴 퇴직 인사 메일 작성을 마치고, 팀 리더십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다. 중간 늙은이들끼리 폼 재던 한 파스타집이다. 회사에 입사하고 늘 다이어트 중이었던 나 때문에, 같이 점심식사를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종종 사치 부리러 오던 집이었는데, 회사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였다.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이, 타 팀 욕, 시스템 욕 등을 한참 늘어놓고, 슬슬 사무실로 돌아온다.
오전에 작성한 퇴직인사 메일을 발송하려는데, 그 와중에 전사 발송 메일을 날려 먹었다. 아웃룩에 전 직원 메일 주소가 없어서 그룹웨어로 작성했던 거였는데, 실수로 브라우저를 그냥 닫아버렸다. 막판에 혼자만 짜증 나는 초보자 같은 실수라니.. 어이가 없다. 기억을 되살려 재빨리 다시 메일을 작성하고, 전사 메일과 팀메일을 차례로 발송한다.
컴퓨터 백업도 모두 마쳤고, 개인 짐은 애초에 정리가 끝났다. 이제 팀별로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릴 시간이다. 그동안 작품과 상품 연계, 도서, 미디어 등 다양한 일을 함께 했던 실무 동료들과, 이런저런 의사 결정을 위해 찾아뵈었던 임원님들을 찾아뵀다. 전 듣지 못해 당황하던 동료들도 있었고, 소식 들었다면서 미국행 소식을 축하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부사장님이나 전무님들도 격려를 해 주신다. 다만 어찌나 회사 안에서의 여러 안타까움을 토로하시던지. 나가는 나한테 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사장님께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린다. 사장님도 꼭 연락 끊지 말라고 당부해 주신다. 절대 이 끈을 놓지 않을 거라고 농담을 섞어 가며 인사를 드린다. 출국 전에 꼭 다시 오라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팀으로 돌아와 가방을 싸고 팀원들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간다. 함께 사진을 찍자 해서 나름 귀여운 분위기의 사내 카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입사 때부터 함께 했던 사람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지냈던 시절이 떠오른다. 일부는 팀이 나뉘고, 일부는 먼저 회사를 떠나기도 했지만, 아직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 이 사람들이 나의 자리를 채워주고, 또 넘치게 성장해 넘어서겠지.
마지막까지 유쾌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 행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별거 아니라는 양.
그리고 다른 때와 다르지 않게 또 퇴근을 한다. 동료들의 편지, 선물 같은 것들이 손에 들려 있기는 하지만, 평소 퇴근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여 이르기는 하지만, 주차장에 내려와 차 문을 열고 짐을 싣고, 몸을 싣는다. 그리고는 유유히 회사의 지하주차장을 나선다. 지난 8년 동안 울고 웃었던 회사 생활이 이렇게 끝이 났다.
퇴사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평소와 같은 경로로 차선까지 똑같이 바꿔가며 집으로 돌아간다. 눈을 감고도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이젠 익숙한 길이다.
하지만 내일부턴 이 길을 가지 않는다. 가장 안쪽, 차들의 속도가 빠른 톨게이트 차로로 가기 위해 여러 번 차선을 바꿀 필요도 없어지고, 터널 바로 밖에 위치한 단속 카메라를 의식해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다. 이 길을 지나가긴 하겠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출발지에서 같은 목적지로 갈 일은 없을 거다.
8년이라는 시간은, 커리어에선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 내 동료들 중에도 10년을 훌쩍 넘겨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고, 심지어 20년을 넘도록 근속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으시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게는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다. 아직까지 초등학교보다 오래 다닌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만 8년이었으니.. 정이 많이 들었다.
그 많은 정을 뒤로하고, 이제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향해 방향을 튼다. 앞에 무슨 일들이 펼쳐질지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의 계획은 수많은 변수에 의해 결국 좌절되거나 수정되고, 내가 생각한 그 어떤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니까.
그렇게, 나는 마지막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Photo by Kenny Elia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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