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외할머니와의 눈물 나는 이별을 마치고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주 내내 짐을 빼고 가구를 드러낸 탓에 홈 스위트 홈 같은 느낌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저기 쌓인 짐들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번 고향 방문 간에 갑자기 나한테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미국 가면 의료보험이 부담스러운 탓에 건강 검진을 거의 다 받고 특별한 문제도 없었는데, 갑자기 두드러기가 올라와 괜히 처 외할머니와 가족들 모두 걱정을 끼쳐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내 알레르기 검사부터 예약을 잡았다.
이런 부분조차 아내와 나의 성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아내는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간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병원에서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 병원에 간다. 내가 견딜 수 있으면 괜찮은 거다. 이런 나를 아내는 고집스럽다고 하고, 그런 아내를 나는 유난스럽다고 한다. 물론 십 년 정도가 지나면 서로서로 섞이고 해서, 나도 제법 제때 병원에 가고, 아내도 제법 참았다 병원에 가기도 한다.
오늘은 주방을 정리해야겠다. 불필요하게 잔뜩 쌓여 있던 식기류나 보관통들은 다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버릴 것이 태산이다.
본가를 떠나기 전 받았던 코렐 녹색 꽃잎 무늬 세트는 삼십 년이 넘어서 버리기 아깝지만, 이젠 놓아줄 때도 됐다. 무거워서 들고 가기 어렵다. 아이가 있는 집에서 유리컵을 쓰기 어려워 샀던 아크릴 컵도 정이 들었지만, 미국 이주에까지 싸들고 갈 정도는 아니다. 정작 별로 비싸지도 않고 무거운 수저는 챙겨야 한다. 한국식 숟가락과 젓가락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 십 년 있었는데, 바리바리 싸 가야 할 좋은 물건을 장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돈 십만 원이 넘는 옷 한 벌 없고, 근사한 그릇 세트나 명품 가방 하나 없다. 이런 물건들을 보면서 지난 십 년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뭐가 그렇게 아까워서 좋은 물건 하나 제대로 못 사고 이런 그지 같은 것들을 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 어차피 이렇게 다 버릴 거 싸게 잘 썼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에도 아내가 공부를 마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 가는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서 정착할지, 직장이나 아이의 학교 때문에 옮기게 될지.
정착을 위해 온라인 장바구니에 수천 불 수준의 쇼핑을 폭발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합리적 소비와 궁상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것 같다. 잘 써야 하는 물건은 적절히 가치 있는 제품으로, 소비성 제품은 가성비만 고려해서 구매해야겠지. 할 수 있을까? 또 그 와중에 값싼 물건만 잔뜩 사다가 아내에게 혼날 것만 같다. 그럼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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