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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프로듀서와 실무자의 언어

by jcob why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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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프로듀서는 업무의 성격상 많은 실무자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데요. 그 범위는 상당히 넓어요. 글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와, 캐릭터 배경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 스토리 보드 작가, 모델러, 애니메이터, 라이팅 아티스트, 컴파지터, FX 제너레이터, 성우, 작곡가, 사운드 이펙트 디자이너, 믹싱 엔지니어 등..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프로듀서가 만나는 사람들만 이만큼이에요. 이 외에도 작품의 상품화 사업을 위한 라이선싱과 머천다이징 담당자, 그리고 미디어 사업을 전개하는 마케팅 홍보 담당자들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해야 하죠.

이처럼 프로듀서로서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소비자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해 의사를 결정하고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요, 그러다 보면 여러 측면에서 서로 의견이 어긋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조율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요. 프로듀서는 대부분 애니메이션을 처음 만들겠다고 결정한 사람(보통은 사장님)의 의견을 대변해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고 토론을 진행한 뒤, 실무자 혹은 전문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게 될지 결정해서 의사를 전달해야 한답니다.

프로듀서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에요. 프로듀서가 작가보다 글을 더 잘 쓸 수도 없고, 디자이너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릴 수도 없으며, 작곡가보다 노래를 더 잘 만들 수도 없죠. 애니메이터보다 애니메이션 자체를 더 잘 만들 수도 없어요.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들보다 전문지식이 떨어지더라도, 그 모든 공정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의사결정을 해서, 실무자 혹은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전달해야 해요. 그러다 보니 프로듀서는 전체 공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랍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무것도 몰라도 프로듀서를 할 수 있기도 해요. 실질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의 공정에서는 프로듀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거든요. 결국은 각 분야를 완성하는 것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상식의 수준에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결과물에서는 큰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프로듀서가 상식의 수준에서 업무를 진행하게 되면, 시청자의 입장이 되어 버려요. 각 공정에서의 전문적이고 실질적인 애로사항들은 간과해 버리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 보기에, 귀로 듣기에 부족한 부분만 지적하고 수정을 지시하기도 해요. 물론 상식의 수준에서 판단하는 것들이,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 것인지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되어줄 수는 있지만, 거기에만 그친다면 제작 공정에서의 실질적인 조율과 협의가 어려워질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프로듀서는 반드시 실무자들의 방법과 언어에 능숙해야 해요.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결국 각 모든 공정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전달이 잘 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감독과 더불어 프로듀서가 판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전달이 잘 되지 않았을 때, 프로듀서가 그저 ‘어, 이게 잘 전달되지 않아요. 이상해요’ 이런 의견만 준다면, 실무자들 입장에서는 ‘뭐 어쩌라는 거야?’라고 할 수밖에 없죠. 그렇기 때문에 프로듀서는 그 ‘전달’이 잘 되지 않았음을 실무자들의 방법과 언어로 보완할 수 있도록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를 보고 사랑에 빠진 장면을 애니메이팅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죠. 애니메이션 실무자는 캐릭터가 특정 행동을 연기하도록 그림을 그리거나(2D) 몸의 움직임을 입력해서(3D) 사랑에 빠진 캐릭터를 표현하죠. 하지만 프로듀서가 이를 검수하면서 이 사랑에 빠진 캐릭터에 대한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판단했어요. 그런데, 프로듀서가 실무자에게 그저 ‘사랑에 더 빠진 모습으로 표현해 주세요’라고만 하면, 실무자는 멘붕에 빠질 거예요. 어떻게 캐릭터가 연기해야 ‘더’ 사랑에 빠진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의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같은 장면에서 작곡가가 사랑에 빠진 감정을 강화하기 위해 BGM을 넣었는데, 로맨틱한 감정이 잘 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여기서도 프로듀서가 ‘더 로맨틱하게 해 주세요’라고만 하면, 작곡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예요.

이럴 때는 애니메이터에게 ‘캐릭터의 눈은 조금 더 넋이 나가게 표현해 주시고, 귀가 빨개지면 좋겠네요’라든지, 작곡가에게 장조 분위기의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흐르는 느낌으로 음악을 조정해 주세요’라든지,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무자가 방법을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의견을 주는 것이 필요하죠. (아, 쓰고 보니 의견 자체가 좋은 의견인지 잘 모르겠네요. 하하) 어떤 이야기, 감정,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의견을 전달하면서 실무자의 언어와 방법을 활용해 의견을 제안한다면, 실무자는 그 의견을 수용할 수도 있고,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귀가 빨개지면 그저 부끄러운 감정만 살 수 있으니, 볼을 빨개지게 해 볼게요’라든지, ‘피아노 선율은 너무 임팩트가 없으니, 비트감을 살짝 주면서 현악기로 분위기를 만들어 볼게요’라든지, 이런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가장 좋은 전달 방법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죠.

프로듀서는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에서 일반적인 느낌과 표현의 구체적인 방법 사이의 가교가 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위에서 이야기한 전 공정-의 이해와 더불어 그 실무 공정에 맞는 언어로 일반적인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그 과정에서 프로듀서가 효과적으로 역할을 하면,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 감정, 의미를 가장 적합한 실무적 방법을 통해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프로듀서가 모든 실무적 솔루션을 다 가지고 있지 않아도 돼요. 공정에서의 실무적인 솔루션은 실무자들과 전문가들이 더 잘 알 테니까 말이죠. 다만 그들의 방법과 언어를 쓰지 못한다면, 내 의견을 전달할 수도, 실무자들의 의견을 이해하기도 어렵게 되고, 그러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시청자들에게 이야기, 감정, 의미를 전달하기도 어려워진답니다.


현직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점, 재미있는 일화, 또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정보들을 같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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