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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상상한 것들이 믿어지게

by jcob why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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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라는 콘텐츠는 상상력의 결과물이에요. 작품에 나오는 이미지는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죠. 이렇다 보니 상상력이 곧 애니메이션 장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애니메이션 제작의 전 과정은 철저한 상상의 나래라 할 수 있어요.

 

요즘은 실사 영화도 점점 상상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아요. 최근 개봉하는 영화는 영상의 상당 부분이 CGI로 채워지는데, 이 부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니까,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죠. 엄밀히 이야기하면 CG로 표현된 이미지는 일종의 애니메이션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 보니 제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CG(VFX 비주얼 이펙트)와 애니메이션을 한 학과에서 공부했답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로 영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이에요. 영상 매체를 위한 스토리 개발은 글을 쓰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이미지화하려다 보니 기획이나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상황이나 이야기가 눈에 잘 보이지 않거든요. 동물 캐릭터가 사람처럼 행동한다거나,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오직 상상만으로 떠올리고 이 안에서 벌어질 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기술이에요. 제가 애니메이션 기획 제작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장애물은 대부분 이런 기술이 미흡하기 때문에 생기죠.

 

그럼 상상하는 것들을 이야기로 잘 만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온 온갖 기상천외한 캐릭터들과 배경, 이야기들을 조합해 만들어 내면 모두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애니메이션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요? 슬프게도 그렇지는 않아요. 아무리 기상천외하고 엄청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들어진 작품이라도, 모든 시청자들에게 그 상상력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상상력의 결과는 ‘있음직 하다’라는 ‘믿음’을 낳아야 한답니다.

 

상상력이라는 것이 생각의 제한이 없기에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아무래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니 오히려 있음 직한 캐릭터라고, 배경이라고, 이야기라고 사람들이 믿게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해요.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득한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것들과 너무나도 달라 납득하기 힘들어지죠. 그러면 ‘에이, 말도 안 돼’ 이러면서 외면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그럴 것 같아’라고 믿게 하는 것이 제작자로서는 너무나도 중요하답니다.

 

작가와 제작자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끊임없는 상상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맘껏 펼쳐 이야기를 조각해 보고, 다시 정말 새로운 검증단이 되어 그 이야기가 믿어지는지 점검하죠. 엘사나 뽀로로, 호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제작자는 이 캐릭터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일일이 상상하고 검증해야 해요. 상상으로 신선함을 준 뒤, 검증으로 믿어지게 하는 거죠.

 

제작자와 작가로서 가장 뼈아픈 피드백은 ‘이 캐릭터의 성격상 이렇게 행동할 것 같지 않다’, ‘믿어지지 않는다’,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같은 피드백이랍니다. (사실 지난주에도 들었던 피드백이라 뼈를 때리네요) 사람마다 상상력의 한계도 다르고, 믿을 수 있는 논리구조의 범위도 다르지만, 통상적인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상상력을 동원해 캐릭터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죠. 만약 다른 사람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으면서도 믿어지고 납득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훌륭하게 상상력을 발휘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고요.

 

전 오늘도 상상과 검증 사이에서 싸우고 있어요. 때로는 기발한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아 좌절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신박하다고 생각한 상상이 검증 단계에서 나가떨어져 좌절하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등장하는 캐릭터가, 배경이,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음 직한 캐릭터와 배경과 이야기로 믿어지게 하기 위해, 그리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현직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점, 재미있는 일화, 또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정보들을 같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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