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jcob why 2022. 9. 27.
728x90

뉴미디어가 발전하면서 한 작품의 제작자들의 코멘트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과거에는 DVD나 블루레이 디스크의 일부 ‘Special Feature’에서만 볼 수 있었고, 제작비의 제한으로 모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요새는 거의 모든 작품의 제작기를 여러 통로를 통해 보거나 들을 수 있게 되었죠. 한 사람의 콘텐츠 제작자로서 다른 다양한 작품의 제작 과정을 들을 수 있어 정말 좋아요.

 

보통 이런 제작 과정 설명 콘텐츠(Behind the Scenes)에서 주의 깊게 듣게 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이 작품을 처음 만들게 되었냐’가 아닌가 싶어요. 보통 제작자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사건이나 지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직접 듣거나 경험한 사건은 워낙 강렬해서 그 안에 의미를 담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크게 생기는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 작품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어린이, 가족용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드는 프로듀서이다 보니, 가족용 애니메이션의 제작자 코멘트를 많이 찾아보는 편인데요.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말하는 영감의 재료는 자신이 어렸을 적 직접 경험했던 일이나, 자신이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했던 사건이라고 하더라고요. 매우 탁월한 영감과 통찰력을 보여줬던 ‘인사이드 아웃’ 같은 작품을 보면 제작자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사건들과 느꼈던 감정, 상상을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해요.

 

제가 어렸을 적 경험했던 일들도 분명 작품을 기획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에요.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일들은 아무래도 그 사건의 과정이나 감정이 구체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조각하다 보면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있음 직한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한계가 있더라고요. 첫째로 기억력에 한계가 있어서 기억이 잘 안나기도 하고, 기억이 난다 해도 20~30년이 훌쩍 지난 얘기라 지금 어린이들이 공감하기 힘든 일들도 많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고 관찰했던 사건들이 아무래도 더 내용도 선명하고 좋은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는 이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물론 국내 많은 제작자분들께서도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시기는 하던데, 사실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자신의 아이를 관찰할 시간이 잘 주어지지는 않아요. 애니메이션 제작이라는 것이 워낙 인력을 갈아 넣어서 하는 일이다 보니, 야근과 주말 근무가 생활화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거든요.

 

제가 지금 다니는 회사 첫 실무 면접을 볼 때의 이야긴데요, 면접관이 제게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저희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면접관이 하시는 말씀이 이런 거 있죠.

 

맞아요. 그런데 우리 아이가 행복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노력해서 작품을 만들었는데, 우리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네요. 너무 바빠서.

 

정말 그때는 그게 현실이었던 것 같아요. 9시에 퇴근하면 정시 퇴근이라 말하고, 12시는 넘어 퇴근해야, 아, 야근 좀 했구나, 하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아직도 그런 회사들이 많은데,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아래에 있답니다) 우리 아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저희 회사 티브이 애니메이션 기획 부서에는 아직까지 아이가 있는 여성분이 한 명도 없어요. 팀 내 남녀 성비가 거의 1:9, 2:8 수준인데도 말이죠. 결혼 뒤 이직하시거나, 출산 후 퇴사하시는 분들이 한때 정말 많았어요.

 

전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 아이가 6개월일 때부터 돌 언저리까지 육아를 전담했었어요. 아내는 출근하고 저는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전업주부였죠.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혹은 한밤중에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이유식을 먹이고, 낮잠을 재우고 또 놀아주고 하는 시간이 매일 반복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를 관찰할 시간이 많았고, 아이에 대한 신기한 발견, 궁금증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그때는 너무나도 힘들었었는데, (세상의 모든 전업주부님들-그게 여성이건 남성이건 존경합니다) 이 시간들은 제가 유아용 콘텐츠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어요.

 

직장에 다니고 나서도 전 운이 좋게도 육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기도 했지만,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회사에서의 야근 대신 심야 재택 야근을 했거든요. 퇴근을 하고 나면 아이가 잠들 때까지 육아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어요. 아이의 어린이집, 유치원 방학 때(보통은 여름, 겨울 일주일 씩 하죠)는 100% 휴가를 쓰거나, 일이 바쁠 때는 회사에 아이와 함께 출근했어요. 물론 이는 유아용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이고, 팀에서도 양해를 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래도 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그만큼 많아지고, 제 아이를 보면서 영감을 얻을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 것이지요. 다행히도 이런 영감의 원천이 제 강점이 되었는지, 회사에서도 나름(? - 제 생각입니다만) 인정받는 기획자로서 업무를 진행할 수도 있었어요.

 

그 후, 어찌어찌해서 팀의 야근은 전반적으로 줄어들고, 육아를 병행하면서 작품 기획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분위기가 바뀌면서 저뿐만 아니라 다른 기획자분들도 육아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고, 육아 과정에서 생긴 여러 에피소드들은 시나리오(스토리)로, 육아 관찰하며 알게 된 아이들의 취향을 반영한 캐릭터의 형태(디자인)로 반영되기 시작했어요. 이게 정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는가에 대해서 제가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내용을 쓰다 보니 마치 일과 육아 병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일정 부분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합니다만) 애니메이션 기획자로서 개인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저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기획하는 프로듀서예요. 저에게 육아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제 일의 영감 소스랍니다.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관찰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의문이, 경험이, 깨달음이 좋은 어린이 작품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리라고 확신해요. 물론 여전히 제가 좋은 아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지만요. 하하하.


현직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점, 재미있는 일화, 또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정보들을 같이 공유합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