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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애들 만화 만드는 것, 쉽지 않아요

by jcob why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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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요, 팀에서 새로 제작하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이 지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지원작 평가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이 열렸습니다. 제가 진행하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프리젠테이션 지원을 위해 참석하게 되었어요. 아직은 한참 제작이 진행 중이어서 메인 프로듀서님을 제외하고는 참석이 어려워, 제가 함께 참석했던 것이었죠. 프레젠테이션을 모두 마치고 난 후, 평가위원님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한 위원님께서 저희 작품의 제작비가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유아용 작품인데, 퀄리티에 비해 제작 단가가 너무 높지 않나요? 또 제작 기간은 왜 이렇게 길죠?

 

저희는 이 작품이 가지는 기술적, 시각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많은 기술 개발이 필요했던 점과, 우리 회사에서 제작하는 다른 유아용 작품과의 제작비, 제작 기간 비교를 통해 제작비가 높은 수준이 아니며, 기간도 적절한 것이라고 답변했었습니다. 꽤나 자주 있는 일이라 의연하게 대처하기는 했지만, 당시 질의를 하셨던 평가위원 분이 같은 업계에 종사하셨던 분이라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다소 평가절하하는 듯한 질의가 아쉽기도 했어요.


사실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업계는 어린이용/유아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되어 있어요. 뽀로로부터 시작해서, 핑크퐁, 아기 상어나 폴리, 타요, 슈퍼윙스, 또봇, 카봇까지, 많은 어린이용 작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있지요. 몇몇 가족용이나, 성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들은 어린이 콘텐츠 제작, 배급을 주력으로 삼고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국내 애니메이션 업체들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주로 제작하는 이유가, 적은 자본이나 노력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 만들기도 쉽고, 돈도 적게 든다는 거죠.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뽀로로 아빠라 불리는 아이코닉스의 최종일 대표님은 자서전에서 유아용 콘텐츠인 뽀로로를 처음 기획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셨는데요. 청소년, 성인, 가족용 애니메이션 장르가 이미 오랜 역사와 노하우를 가진 미국산이나 일본산 작품으로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블루오션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유아용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작품을 고퀄리티로 만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유아용 콘텐츠가 돈이 적게 들거나 만들기 쉽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당시 그 시장이 블루오션이었다는 거죠. 그 후에 많은 회사들이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요. 성공 사례가 있으니, 그 성공 사례를 잘 따르면 되거든요. 이건 작품을 만들기 쉽다거나 돈이 적게 든다는 것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애니메이션 기획자로서 봐도, 어린이용 콘텐츠를 만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전 어릴 적에 방송국에 다니면서 15~19세 관람가 드라마 제작팀에서 조연출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기획을 진행할 때가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어른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비교할 때, 어린이용 작품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보통 어린이들은 콘텐츠를 볼 때 집중력이 많이 높지 않아요. 그래서 어린이 콘텐츠는 대부분 10~30분의 짧은 길이를 가지고 있죠. 국내에서 어린이용(특히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에피소드 별로 15분 정도의 길이예요. 이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길이가 워낙 짧다 보니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에요.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결말이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유아용 콘텐츠 스토리텔링 성패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죠. 또, 길이가 짧은 반면 에피소드의 양은 많기 때문에 계속해서 신선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너무나도 힘든 일이에요. 그러다 보니 고작(?) 15분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쓰는데만 한 달이 훌쩍 넘게 걸리기도 한답니다.

 

거기에 유아용 콘텐츠는 대사를 쓰는 것도 많이 어려워요. 아직 언어 발달이 완전하지 않은 어린이 시청자를 위해 가급적 적은 대사로 스토리를 온전히 표현해야 하죠. 거기에 바른말 사용은 필수예요. 욕설이나 비속어 사용은 물론, 어법에 맞지 않은 대사를 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요. 시청자 입장에서는 간헐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캐릭터들의 좋지 못한 대사 때문에 화가 나시겠지만, 제작자들은 캐릭터들이 한 마디라도 올바른 언어로 대사 하도록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답니다.

 

디자인은 또 어떻고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취향의 캐릭터와 배경 등을 디자인하기 위해 많은 디자이너들이 긴 시간 작업을 이어간답니다. 어린이 시청자들은 직관적이라 딱 보기에도 귀엽거나 멋있지 않으면 그 작품은 바로 외면받기 십상이에요. 그런데 직관적으로 보기에 귀엽거나 멋지면서도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참신한 디자인,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더라고요.

 

실제 그림을 만들어주는 에니메이팅과 렌더/합성에서도 어린이 시청자들을 위한 맞춤 작업들이 이뤄져요. 유아용 콘텐츠라고 퀄리티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의 연기, 화면 연출, 그리고 보기에 편안한 시각적 효과들이 더해지죠.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것과 동시에,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만들기 어렵다’에 깊은 공감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은 굉장히 노동집약적이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요. 약 50여 명의 사람들이 한 개의 TV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을 걸쳐 제작한답니다. 고작 30분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몇 개월은 후딱 지나가 버려요. 그 시간동안 수십 명의 전문가 분들이 어두운 곳에서 고성능 컴퓨터 앞에 앉아 한 두 프레임의 움직임을 위해 씨름하셔야 하죠.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드는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국산 애니메이션 작품들에 조금만 더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시청해 주시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ㅎㅎ

 

애들 만화 만드는 것, 정말 쉽지 않아요.


현직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점, 재미있는 일화, 또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정보들을 같이 공유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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