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는 회사에서 신작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어요. 오랜 기간 동안 회사 프랜차이즈 작품의 시즌 기획과 제작에만 참여하다가, 드디어 제게도 새로운 작품을 기획, 제작할 기회가 온 거죠. 기존의 회사에서 제작했던 작품과 차별화되면서도, 회사 작품의 정체성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프랜차이즈 개발이라는 중책이 제게 주어졌어요.
사실 기존 프랜차이즈의 시즌 작품을 기획하다 보면, 답답한 것들이 조금 있어요. 아무래도 처음 기획할 때 정해놓은 여러 가지 설정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때 발목을 잡는 경우들이 종종 있거든요. 반면에 정말 새로운 작품을 기획할 때는 그런 어려움은 없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설정을 처음부터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정말 기대를 많이 했어요. 남이 해 놓은 설정에 맞추어 작품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작품을 기획하는 것은 모든 콘텐츠 기획자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애니메이션 산업처럼 매우 작은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너무너무 신나게 기획 작업을 하리라 기대했죠.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정말 새로운 거라고 실컷 기획하고 나면 어디에서 만든 작품과 비슷하고, 또 다른 방향으로 기획하면 저기에서 만든 작품과 비슷하고. 심지어 어떤 기획 발표 땐 생전 제가 무슨 작품인지 본 적도 없는 작품과 완전히 판에 박은 듯 똑같았던 적도 있어요. 소재와 주제, 그리고 세계관, 상품화 아이템까지. 아, 정녕 제가 이렇게 창의성이 없는 사람인가요? 울부짖었죠.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기 위해서는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뭐, 사실 애니메이션 작품만 그런 것은 아니죠. 기업에서 만드는 어떤 상품이든 처음 기획되어 소비자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애니메이션 작품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게 조금 더 맞겠네요.
시장에 나와 성공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은 소비자들이 원하지만 기존에는 없었던, 하지만 너무 낯설지는 않고,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던 그런 ‘와우 포인트’가 있는 그런 작품이어야 하죠. 이 말장난인 듯한 조건에 맞는 작품을 기획하기 위해 고민하고 회의의 회의를 거듭하게 돼요. 그러고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시 고민의 시간에 돌입하게 되고요.
무릎을 탁 치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이내 또 비슷한 것을 찾아내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마침내 찾아내면? 그건 완전히 이상한 내용이죠. 아, 정말 세상에 정말 새롭고 신박한 기획은 없는 건가요? 3,000여 년 전에 솔로몬이 이미 이 진실을 알았다는 게 놀라울 뿐이랍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것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전도서 1:9 새번역 RNKSV)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나오는 극장판이나 티브이 시리즈 국산 애니메이션 신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이미 잘 된 작품의 후속 시즌이거나, 기존 작품을 약간 변형시킨 새로운 시리즈인 경우가 많죠.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특히 아이들의 취향이 꽤나 한결같은 편이고, 새로운 작품이 나와도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확실한 성공 공식을 따르려는 여러 회사들의 전략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애니메이션 회사들도 모두 신작 기획/제작을 위해 많이 애쓰고 있어요. 다만 시장에 나오는 작품이 적을 뿐이죠. 큰 애니메이션 기획 회사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위해, 작은 제작사들은 자기들만의 IP를 개발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작 기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죠. 하지만 아무래도 투자 유치가 쉽지 않다 보니 빛을 보지 못하고 기획과 파일럿, 트레일러 단계에서 사장되는 작품이 많아요.
저희 회사도 오리지널 작품을 여럿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 수년간 기획하던 신작이 여러 편 보류되었어요. 그만큼 자본을 가지고 있는 회사도 새로운 작품을 하나 론칭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야심 차게 여러 방향으로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지만 이내 동력을 상실하죠.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일본의 모 회사 작품을 누를 만한 작품, 미국의 모 회사를 잡을 만한 작품이라고 믿고 기획을 진행했는데, 설정과 스토리 개발 단계에서만도 수 만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거든요. 너무 새로워 낯설다든가, 너무 비슷한 작품이 많다든가 그런 거죠. 혹은 시장의 경쟁작이 너무 막강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적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또다시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획을 시작해야 하죠. 이미 좋은 작품이 수없이 많지만, 시청자들은 더 완성도가 높고 새로운 작품을 기대하니까요. 그런 소비자,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전 어떻게 접근하며 작품을 기획해야 할까요?
수년 전, 씨제이이앤엠의 스타 예능 제작 피디이신 나영석 피디님이 예능프로 ‘유 퀴즈’에서 자신이 좋은 예능 신작 작품을 계속해서 성공시킨 비결(?)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요.
자기가 원래 잘하는 것을 하자.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20 퍼센트 정도 넣어보자.
전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익숙하지만 새로운 느낌을 잘 받을 수 있겠죠? 이런 성공한 기획자 분들의 다양한 성공 비결을 듣는 것은 제게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신작 애니메이션 작품을 기획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 그저 월급쟁이 애니메이션 기획자인 저로선 쉽게 얻지 못할 기회를 얻은 셈이에요. 저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나영석 피디님처럼 제가 성공시킨 저만의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반대로 남들이 원래 잘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저만의 것을 20~30 퍼센트 넣는다면 좋을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답니다.
현직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재밌고 유익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제 일을 하면서 느끼는 점, 재미있는 일화, 또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정보들을 같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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