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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예쁘면 다 디자인인가

by jcob why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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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제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선 콘셉트 디자인이 한창이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지고, 이야기를 위한 주인공, 그리고 이야기가 벌어질 장소들에 대한 전체적인 세계관이 어느 정도 정해지고 나면 디자인 팀에서는 콘셉트 디자인을 진행하게 되는데요. 콘셉트 디자인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들과, 주요 배경들을 작품의 콘셉트에 맞도록 스케치하고 다듬어서 작품에 등장하게 될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작업이에요. 제 작품도 기획 단계에서 몇 번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끝에 콘셉트 디자인까지 들어가게 되었죠. 주인공 캐릭터 무리들에 대한 스케치도 하고, 주요 배경에 대한 디자인도 슬슬 작업이 시작되고 있어요.

 

사실 디자인이란 작업은 애니메이션 제작 단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여러 산업에서 제품이나 서비스 등을 제작할 때 디자인은 굉장히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소비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일차적으로 경험하는 요소가 바로 디자인이니까요. 무수히 많은 제품과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작품도 디자인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애니메이션은 그림이고, 시각적인 요소가 그 성질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만큼, 디자인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작품뿐 아니라 실질적인 매출에 영향을 주는 상품 제작에도 큰 영향을 주죠.

 

그런데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디자인이 그저 예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무조건 예뻐야 해. 뭐 이런 거죠. 이게 꼭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된 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상품이나 제품도 디자인은 예뻐야 해. 이런 것들이 있는 것처럼요.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 혹은 시청자 입장에서 그렇게 제품이나 상품, 작품을 대하는 것엔 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을 가지고 소비하는 수용자로서의 태도일 테니까요. 하지만 기획자, 혹은 디자인 실무자로서는 조금 다른데요. ‘예쁘냐 안 예쁘냐’는 디자인 과정에서 고려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이랍니다.

 

디자인의 가장 큰 ‘목적’은
‘디자인되는 주체의 기능을 최적화하기 위한 모양을 만드는 거’ 예요.

이건 모든 디자인의 영역이 다 마찬가지죠. 그래픽 디자인이든 산업 디자인이든 웹 디자인이든, 그 만드는 물건이 ‘가장’ 잘 기능할 수 있으면 되는 거예요. 애니메이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어요. 캐릭터나 배경들이 작품 안에서 가지고 있는 목적과 기능이 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 디자인이랍니다.  특히 프로듀서로서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면서 저는 이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고 디자인을 점검하고 디자인 팀장님과 소통하고 있어요. 이 디자인이 작품의 기획 의도에 부합하는지,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는지, 이런 부분들 말이에요. 가급적 디자인에 대해서 제 심미적인 호불호는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 부분은 디자인 팀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기도 하고, 심미적인 부분에 프로듀서가 신경을 쓰면 ‘목적과 기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캐릭터는 작품의 기획에 맞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기획 단계에서 부여한 목적과 기능, 그리고 스토리 개발 단계에서 부여한 성격과 행동, 생각, 말투가 그 캐릭터의 디자인에 반영되어야 하죠. 이게 단순히 예쁘게만 표현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기획, 스토리 단계에서 설계된 캐릭터의 모습과 디자인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디자인 자체가 심미적으로 아름답지 않더라도 시청자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캐릭터는 예뻐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캐릭터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 거예요.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은 보이는 것 만으로는 느껴지지 않아요. 작품의 이야기와 배경, 그리고 가지고 있는 성격과 말투, 행동이 다 합쳐져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거죠. 다들 그런 경험 있으시잖아요. 너무 예쁜, 잘생긴 배우가 나와서 잔뜩 기대하고 보게 된 영화나 드라마가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적도 있고, 정말 싫어하고 예쁜지, 잘생긴지 모르겠는 배우가 나와서 보기 싫었는데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봤다가 푹 빠진 적도 있죠. 전자는 작품에서의 캐릭터 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고, 후자는 작품에서의 캐릭터 매력이 훌륭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렸을 적에 만화책을 즐겨 봤는데요. (많이는 안 보고 남들이 보는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때 디자인 면에서 참 정이 가지 않았던 작품 중에 하나가 ‘꽃보다 남자(만화책)’ 였어요. (이건 정말 옛날 얘기랍니다. 90년대예요. 대만 드라마 ‘유성화원’도 나오기 전… 나이가 드러나나요?) 물론 전 순정만화를 많이 좋아하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유행했던 ‘오디션’, ‘풀 하우스’ 같은 것들은 좀 봤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꽃보다 남자’의 그림체는 정말 정이 가지 않더라고요. 빠글이 머리 남자 주인공에 희한해 보이는 신체구조 등등.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몸통이 엄청 작고 팔다리가 엄청 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안 보다가 한 번은 책 대여점(아! 이 올드함)에서 제가 보던 만화가 휴재해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때우려 ‘꽃보다 남자’를 보게 되었거든요. 근데 꽤나 재밌는 거예요. 푹 빠져서 수십 권을 며칠 만에 봤던 기억이 있어요. 제겐 이상해 보였던 캐릭터의 디자인은 작품에서의 캐릭터 매력이 오히려 잘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던 거죠. (근데… 완결이 되긴 됐나요? ㅋ)

 

전 콘텐츠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전문 분야를 활용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거죠.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콘셉트 디자이너는 가장 강력한 툴을 가지고 있는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해요. 작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그림이잖아요. 캐릭터의 작은 인상 하나하나에서, 배경의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요. 오늘도 전 제 전문분야인 프로듀싱에서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답니다. 함께 해 주시는 수많은 디자이너 분들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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