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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다들 실패를 통해 성장했다면서요

by jcob why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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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토크쇼에 나오는 저명인사들이 인생의 성공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한결같은 대답이,

 

이때 이때 이렇게 실패했었는데, 그걸 발판으로 해서 성공할  있었어요.

 

라고 대답해요. 실패한 원인을 찾아서 분석하고 같은 실수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연습하니, 성공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제가 일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지금 성공해서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작품들의 이면에는 위와 같은 성공 스토리가 있죠. 대부분의 앞 세대 제작자들에게는 소비자의 성향을 잘 못 읽어서 외면받는 작품을 내놓거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을 내놓아서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 실패에서 잘못하거나 실수했던 일들을 찾아내고, 이를 수정해 새로운 기획에 반영하면서 제작한 작품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죠.

 

큰 성공으로 기획/제작자 집단은 기업화되면서, 회사에는 이제 기획과 제작을 전담할 수많은 직원이 생기게 되었어요. 앞선 글에서 말했다시피 상업 애니메이션은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것이고, 전 세대 제작자들이 기업을 경영해야 하니, 계속 기획과 제작 실무에만 매달릴 수는 없잖아요. 새로운 기획/제작 인력들은 전문성을 앞세워 회사 안에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제작하게 되죠. 조그만 규모의 그룹에서 으쌰 으쌰 고생하며 작품을 제작하고 방영처를 찾던 시절을 벗어나 어엿한 콘텐츠 산업의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에요.

 

전 세대 기획자에 비해서 다음 세대의 기획자들은 콘텐츠 기획, 제작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고 산업에 유입된 인력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20세기 때는 만화/애니메이션이 어엿한 산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대학교에도 전문교육을 하는 학과가 거의 없었거든요.  선배 기획자분들 덕에 애니메이션 사업 분야가 유망한 산업이 되었고, 그 덕에 학교에서도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어요. 선배들의 경험과 후배들의 전문지식이 합쳐져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만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거죠.

 

아쉽게도, 그런 핑크빛 전망은 현실화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이 21세기 들어 약 20여 년간 발전하긴 했지만,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진 못했거든요. 음악, 방송, 영화 산업도 같은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 세대 기획자들과 전문교육으로 무장한 다음 세대들이 산업에 유입되었고, 이들 산업은 2000년대 이후의 정부 정책과 맞물려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죠. 애니메이션 산업도 함께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비하면 기대한 만큼의 성장은 아니었어요.

 

그러면 왜 애니메이션 산업은 다른 산업만큼의 성장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물론 워낙 많은 외부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제가 생각하는 큰 이유는 애니메이션 산업 특유의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크게 성공한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소리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예요. 물론 그 말도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어요.

 

워낙 시장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작은 실패 하나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산업이에요.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한 작품에 수십 억의 투자금을 들여야 하고, 시간도 굉장히 많이 써야 해요. 그 긴 기간 동안 해당 콘텐츠에서는 아무런 수익도 기대할 수 없이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런 위험부담을 안을 수 있는 제작사는 국내에 많지 않거든요. 작품의 성공으로 투자금과 기간 대비 수십, 수백 배의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지 않으니, 함부로 모험을 하기가 어렵기는 하죠.

 

그러다 보니 과거의 성공에 기대서 모험을 하지 않고 후속 시즌, 비슷한 작품, 남들이 했던 것들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혹은 신작을 하더라도 전 세대의 기획자들이 여전히 주도해서 작품을 만들어 가죠. 후속 시즌 제작의 경우는 새로운 세대의 기획자들에게 기회가 오지만, 신작 제작에서는 다음 세대 기획자들에게 역할이 잘 주어지지 않아요. 기존 작품의 후속 시즌과 같은 작품만 계속 진행하게 되면, 기획자들의 역할은 한정될 수밖에 없어요. 기존에 이미 기획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만들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은 줄어들 수밖에 없거든요.

 

이런 제작 환경은 작은 나비효과를 낳는데요. 바로 후배 기획자들이 성장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에요. 기획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토리로 창의력 넘치는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을 통해 경험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면서 성장하는데,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면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죠. 물론 후속 시즌 제작에서도 창의성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신작 제작에 비할 바는 아니에요. 즉 다음 세대(이미 기업이 된 제작사에 취업해 기획자로 일하는)의 기획자들은 실패할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상태에서 작품을 만드는, 어떻게 보면 온실 속 화초가 되어가고 있어요. (물론 야지에서, 즉 회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회사를 하면서 작품을 기획해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경험 끝에 성공하시는 많은 좋은 기획자분들도 계시답니다. 무척 어려운 환경이지만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는 회사 내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흥미로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보통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는 과정은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에서 감독이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과정인데요. 픽사에서는 사내 감독 역량을 보이는 직원들에게 단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할 기회를 줘요. 그리고 좋은 성과를 거둔 감독들에게 장편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주죠. 이번에 공개된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도미 시' 감독이나, '굿 다이노'를 연출했던 한국계 '피터 손' 감독도 이렇게 감독이 됐답니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기회를 주는 것, 어떻게 보면 실패할 기회를 주는 거죠. 실패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받는다는 게 어찌 보면 큰 혜택이라 할 수 있어요.

 

애니메이션 산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해요. 과거 선배들이 과감하게 도전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 좋은 작품을 만들었던 것처럼, 다음 세대의 기획자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필요해요. 물론 많은 회사들이 어려운 환경에도 이러한 도전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다음 세대 기획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선배들이 보기에 그러한 도전이 무모하고 부족하고 실패의 가능성이 높아 보이더라도, 작은 실패의 기회라도 주고 응원해주고 믿어줬으면 좋겠어요. 작은 실패의 경험이 (물론 바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다음 세대를 성장시키고, 전 세대 기획자들이 힘들게 가꾼 애니메이션 산업을 더 융성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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