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애니피디다!/애니 만드는 남자

엇갈린 운명

by jcob why 2022. 10. 18.
728x90

애니메이션 업계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많아요. 만화영화를 좋아하고 만화책을 끼고 살았던 사람들 말이죠. 꼭 어린 나이가 아니더라도 다른 업계에 비해서 이른 나이에 진로를 확정하고 노력해서 그 자리에 서게 된 사람들이 많은 편이죠. 적어도 고등학교 시기엔 애니메이션을 하겠다 마음먹고  전공을 선택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만큼 하고 싶어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사람이 다른 업계에 비해서 많은 편이죠.

 

하지만 분야가 전문적이고 정보가 많지 않아서, 업계에 진입 장벽이 조금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보통은 진로와 진학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부분이 많은데, 진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관련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은 편이죠. 그래서 꿈만 꾸다가 정보를 구하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해요.

 

반면 이쪽 일을 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가 애니메이션 기획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람들도 있어요. 대학 동아리에서 만화를 그리다가, 순수 미술을 하다가, 혹은 완구나 상품 개발을 하다가도 애니메이션 일을 시작하게 되기도 하죠. 누구는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는데 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고, 누구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 일에 들어서는 사람도 있고, 인생은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적부터 애니메이션 기획자가 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어요.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죠. 그래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어요. (제 인생도 클리셰가 심하네요) 그래서 대안으로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고, 졸업한 뒤엔 방송국에 조연출로 취업했어요. 비록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감이 매우 높았죠.

 

하지만 일은 고되고 지쳐갔어요. 이런 힘겨움이 도저히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더라고요. 저보다 십 년 앞선 선배들도 똑같이 고된 삶을 살고 있었어요. 제가 십 년을 더 일해도 여전히 고되고 힘들 것 같았어요. 일의 무게를 제 열정이 따라가지 못한 거겠죠? 결국 저는 도망을 선택했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이런저런 포장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도피성 유학이었죠. 처음엔 업계를 정말 떠나겠다고 다짐했는데, 오히려 더 가까워졌어요. 영화과를 선택했거든요. 어차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일도 고되면 견디기 어려운데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자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진학한 학교는 애니메이션과 시각효과가 유명한 학교였어요. 마침 아바타나 토이스토리 3 같은 그쪽 분야의 끝판왕과 같은 작품들이 한창 나왔고, 저는 그런 작품들에 매료되었어요. 그래서 영화과 프로듀싱 학생으로서 애니메이션 학과와 협업하는 길을 선택하고 계속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게 되었죠.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을 하자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어요. 제 스스로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반면, 제 아내는 어렸을 적부터 시각효과, 3D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어 했어요. 쥐라기 공원과 토이스토리를 보고 마음을 먹었죠. 하지만 그때는 정말 정보가 많지 않았고,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진학/진로 상담은 더더군다나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아내는 선생님들의 이상한 진로 상담의 결과로 시각디자인 학과에 진학했는데, 그쪽으로 가서는 애니메이션으로 가는 길이 요원했어요. 물론 정보를 잘 찾아서 애니메이션 쪽으로 진로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시각 디자인도 아내의 적성에 잘 맞는 편이었고, 웹디자인 업계를 지나 UX 전문가로 그 트랙이 변화해 왔어요.

 

아내는 지금 일도 참 만족하면서 하고 있지만, 제가 애니메이션을 하다 보니 가끔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해요. 고등학교 때 진로 상담을 했던 자신의 고3 담임 선생님을 마구 욕하면서 말이죠. 조금만 정보가 많았다면 자신이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더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며 제 업무에 대한 디스를 심심찮게 날린답니다.

 

처음엔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는 사람들의 전공과 관련된 글을 쓰려다가, 전혀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달라졌어요. 사람의 인생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누구는 애니메이션을 그토록 하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일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생각도 한 적 없는데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십수 년을 일하고 있고. 저는 지금 제 일이 참 재미있고 누구보다 애니메이션을 사랑하지만, 또 누가 알아요? 지금부터 십 년 이십 년 후엔 또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