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해서 살다 보면 많이 생각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날씨다. 8월 초에서 중순이 넘어가면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을 특별한 징조가 없이도 알 수 있고, 11월 중순이 다가오면 그때의 날씨 경향과는 무관하게 반짝 하루 이틀 추위가 오는 것도 알 수 있다. (수능 추위라고 하지) 그만큼 봄이 되어서도 3월은 아직 춥고, 4월엔 아무리 따뜻해도 겉옷을 하나 정도 챙기는 것이 좋으며, 5월엔 가끔 반팔을 입는 것이 당연한. 그렇게 날씨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한 곳에 오래 살아 몸과 머리에 날씨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이주하고 어쩌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날씨다.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남반구 국가로 이주하면 여름과 겨울이 완전히 뒤집힌 생활을 하기도 하고, 동남아로 이주하면 겨울 없이 건기와 우기에 적응해야 한다.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의 날씨는 통상적으로 한국의 날씨와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디테일에서 다른 점이 많고, 이에 늘 적응해야 한다.
15년 전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로 처음 유학을 왔을 땐, 1년 내내 서늘하고 건조한 날씨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여름에 가장 더울 때는 20~25도 정도, 어쩌다 하루 이틀 30도를 넘는 정도였고, 겨울에도 추울 때 5도, 그래도 10도는 되는 정도의 날씨였다. 처음에는 여름엔 너무 썰렁해서 힘들었고, 겨울엔 따뜻해도 내내 비가 오는 통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적응하고 난 뒤엔 한국의 여름과 겨울은 또 죽을 맛이 되어 버리니, 사람이란 참 적응의 동물인 듯하다.
처음 이곳 펜실베이니아로 오는 것이 확정된 이후로 가장 먼저 점검했던 것은 날씨였다. 한국과 비슷한 날씨라는 이곳, 과연 정말 그럴지 의심이 되었다. 10년 전의 뉴욕도 여름의 더위가 한국과 비슷하다 했지만, 정말 쪄 죽는 줄 알았으니까. 이곳은 여름은 조금 덜 덥다고 한다. 다행이다. 비도 폭우가 오거나 하지는 않는단다. 허리케인의 경로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지는 않다고 한다. 이 또한 다행이다. 그런데… 겨울에 혹독하게 춥고, 눈이 많이 온단다.
그렇구나. 응?
유독 길고 추운 겨울. 우리가 대비해야 하는 가장 주요 날씨 이슈였다. 관련한 블로그 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아이젠이 달린 방수 부츠가 있어야 한다거나, 사륜 구동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이 좋다는 등, 겨울 준비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르면 11월에도 눈이 오고, 늦으면 5월에도 눈이 온단다. 부피가 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입던 롱 패딩 같은 겨울 옷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바리바리 싸들고 오게 된 이유였다.
한 11월 초까지는 너무 따뜻한 가을날이 계속되었다. 낮엔 늘 20도 안팎을 유지하고, 가을볕이 쨍쨍한 덕분에 정말 겨울이 많이 추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은 단단한 오해였지만.
11월 10일을 지날 무렵, 갑자기 아침 기온이 0도 아래로 떨어지더니, 낮에도 한자리 수 기온이 유지되는 날씨가 지속됐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부터 하늘의 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오후부터 함박눈이 쏟아진다. 11월 중순의 눈. 한국에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 20도를 넘나드는 따뜻한 가을날이었기에 엄청 갑작스럽다.
오후에 아내를 데리러 학교에 가는데, 그 길이 괜히 겁난다. 아직 영하 5~6도인 상태에서 눈이 오는 게 아닌 데다, 통상 이렇게 이른 눈은 행정 당국이 제설이나 이런 부분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아,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새롭게 이주한 이곳의 행정 능력은 내가 경험한 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운전해서 도심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좀 멀지만, 대부분 고속도로를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이번에 구입한 차도 사륜구동 차량이라 안심이 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각별히 주의해서 안전하게 아내의 학교까지 라이드를 다녀왔다.
현지 친구가 하는 말이, 눈이 굉장히 빨리 온 것도, 많이 늦게 온 것도 아니라고 한다. 제설은 돌소금으로 하는데, 워낙 신속하게 움직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눈 오자마자 큰 트럭들이 소금을 뿌리고 다닌다. 눈은 금방 녹았는데, 소금 때문에 노면과 내 차가 하얗게 변해 버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며칠 춥다가 또 갑자기 한 일주일 정도 10도를 넘나드는 따뜻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사계절을 다 지낼 때까지는 한 곳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우린 여름에 이곳에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겨울과 내년 지나고 다가올 봄을 지내봐야 한다. 지금까지 느낀 바로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사계절 내내 눈비가 골고루 오고 각 계절 별로 그 정취가 풍부한 날씨라고나 할까?
눈까지 오니 집안이 너무 춥다. 진짜 겨울을 날 수 있는 집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집에 달린 온풍기만으론 이 겨울을 충분히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디에이터 히터와 같은 난방기를 몇 개 구매해야만 할 것 같다. 벌써 한국 아파트의 온돌과 신식 창호의 단열의 그립다.
그나저나 내가 미국에 사는 기간(샌프란시스코 5년, 라스베이거스 6개월, 뉴욕 6개월, 그리고 펜실베이니아 4개월) 동안 눈은 처음 맞아 본다. 샌프란시스코와 라스베이거스는 눈이 오는 곳이 아니고, 뉴욕에는 봄과 여름에만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겨울이 더 기대되면서 걱정된다. 이 겨울 모두 따뜻하게 보낼 수 있길.
Photo by Satyan Chawla on Unsplash
'나는 미국에 산다! > 주부 남편 아빠 미국 정착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D+113 추수감사절 스터핑 레시피를 받다 (1) | 2022.12.06 |
---|---|
D+108 자격지심 극복 대작전 (0) | 2022.12.06 |
D+105 나이 많은 세탁기와 건조기 (0) | 2022.12.01 |
D+100 100일간의 미국 정착, 우리는 정착했을까? (0) | 2022.12.01 |
D+98 마침내 집에 온 새 가족 때문에 흥분의 도가니? (0) | 2022.1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