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아내는 20대부터 해외 생활 경험이 많았다. 아내는 20대 초반에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어학연수와 유학 생활을 했고, 나는 20대 후반에 미국에서 대학원 유학 생활을 했다. 그래서 10년을 한국에서 지냈어도 다시 미국에 가기로 했을 때, 두려움이 많지 않았다.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예측이 가능하고, 어떤 장애물이나 어려움을 겪을지 알기 때문에 마음에 각오를 다지기에도 좋았다.
미국 유학 시절 태어난 딸아이는 달랐다. 미국에서 태어나 서부 끝에서 동부 끝까지 이주하는 엄청난 일들을 겪었음에도, 그 모든 일들은 고작 첫돌도 지나기 전의 일들이다. 돌이 막 지난 13개월 때 한국으로 들어온 뒤, 약 10년, 정확히는 9년 동안 한국에서 한국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당연히 미국에서의 생활은 1도 기억하지 못하고, 작은 기억의 단편조차 없었다. 그러니 처음 엄마와 아빠가 미국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얼마나 두렵고 걱정되었을까.
거기에 팬데믹 때문에 거의 2년간 학교를 가지 않다가, 미국 출국을 한 학기 남기고서 모든 비대면 수업을 중단하고 정상 등하교가 시작되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아이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고학년의 경계에 선 여자아이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금방금방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내내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학교를 가도 가는 게 아닌 것 같은 시기를 보내다가, 미국에 가려니 폭풍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학기가 끝나자 그렇게 가까워진 친구들을 모두 떠나야 했다. 어림짐작으로나마 딸아이가 얼마나 심적으로 어려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 처음 이주할 때, 아내와 나는 아이가 미국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한국에선 3학년, 4학년이면 공부에 제대로 집중해야 한다느니, 이때 공부 습관 들이면 그 습관으로 평생 쉽게 공부한다느니, 이런 이야기들로 사람을 홀리지만, 그런 어지럽히는 말들에는 귀를 닫기로 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갑자기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은 10살 배기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응만 잘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싶었다.
정작 학부모로서 나와 아내는 엄청 우왕좌왕했다. 학교에서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이를 위해 무엇을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경험해 본 일이라면 이건 어떻다, 괜찮다 말이라도 할 텐데, 미국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학교에서 오는 연락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고, 학교 온라인 시스템에 뜨는 성적이나 숙제 알림엔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방과 후 수업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 얻는지도 몰라 아이가 하고 싶다던 방과 후 수업을 놓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적응이 빨랐다. 학교에 출석하기도 전 치러진 영어 테스트도 곧잘 보더니, 수업도 꽤나 잘 따라갔다. 부모인 나도 아이 숙제나 테스트를 놓쳐버리곤 했는데, 아이는 알아서 스케줄 확인하고 시험 준비를 하기까지 했다. 학업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도 조금씩 사귀기 시작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케도니아 이성 친구와는 주말에도 만나서 놀만큼 친해졌고, 학교에서도 같이 식사하고 리세스 시간을 같이 보내는 친구들이 생겼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오늘은 학교에서 두 번째 쿼터를 마치는 서비스데이였다. 미국 초등학교는 겨울방학이 따로 없고 크리스마스, 연말 연휴가 지나면 바로 수업을 이어가기 때문에 1년을 두 학기로 나누지 않고 쭉 이어간다. 다만 각 과목과 성적을 네 번으로 나누어 내는데, 오늘이 그 두 번째 성적이 나오는 날이다. 부모 된 입장에서 성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성적이 나오면 눈이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놀랍다. 전 과목 A를 받아왔다. 전 과목이라고 해봤자 문법, 수학, 사회(소셜스터디), ESL, 음악(?)이 다다. 하지만 성적이 A인 것을 떠나서 아이가 학교에서 다른 언어로 가르치는 내용을 집중하고 따라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했다. 더구나 소셜스터디는 미국의 각 주나, 지역, 그리고 그 역사를 배우는 과목이어서 아이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과목인데도 꽤나 열심히 한 모양이다. 아이가 성적을 잘 받은 것에 기분이 좋은 걸 보니, 한국 부모이긴 한가보다.
세 번째 쿼터를 시작하는 다음 주부터 아이는 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도전한다. 당장 다음 주 20일부터 4주간 매주 금요일 ESL 테스트를 치러야 한다. 영어에 대한 추가 교육 없이 미국 학교 교육을 따라갈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시험인데, 합격하면 5학년부터는 ESL 없이 모든 수업을 같은 반 친구들과 들을 수 있다. 부담은 주지 않지만 또 잘 치렀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또 방과 후 수업 중에 하나로 농구 클래스에 참여해 보기로 했다. 미국에서 아이를 교육하게 된다면 단체 운동을 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아이가 관심을 가져서 계속했으면 좋겠다. 또 23일엔 그 영화에서만 보던 미국 초등학교 사이언스 과제를 만들어서 제출해야 한다. 모두 새롭고 흥미로운 도전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땐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지 못하고, 막연하게 걱정만 하고 적응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미안했다. 그럼에도 딸아이가 스스로 잘 적응해서 생활하는 것 같아 대견하다.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큰 걱정이고 짐이었는데, 오히려 아이가 큰 짐을 덜어주었다. 고맙다.
Photo by Monica Sed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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