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딸아이의 초등학교 어학 수업에서 가족 초청 모임을 계속 안내했었는데 날씨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 밀리다가 학년을 거의 마쳐가는 5월이 되어서야 그 스케줄이 확정되었다. 저녁 여섯 시부터 시작하는 모임이어서 ‘포트락’으로 음식을 준비해 함께 나눈다고 해 음식도 준비해 가야 하는 모임이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어학 수업을 듣는 한국 사람은 우리 딸뿐이다. 학교에 한국인이 우리 딸 뿐인지는 잘 모르겠다. 모든 학생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 하니까. 다만 어학 수업엔 우리 딸 뿐이고, 얼마 전까지 같은 아파트의 석사 공부를 하시던 분의 2학년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분이 과정을 모두 마치셔서 이번 주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이번 모임은 아이의 학교만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이 지역 교육구의 모든 학교가 참여하는 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한국 사람도 좀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내가 사는 곳은 미국의 중소 도시라 한인들이 많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유명 대학교가 있지만 세계적 명성과 들어가기 어려운 것에 비해 한국 국내에서의 명성이 다른 탑 대학교에 미치지 못하다 보니 유학생들이 선호하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올 때만 해도 한인 커뮤니티가 전멸이겠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한국인들이 많았다. 이유인즉슨 근처에 한국 대기업 지사가 많아서 순수 한국인 주재원들이 많이 찾는 도시였던 거다.
그래도 한인들이 많다 이야기만 들었지 체감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아내는 학교에 가느라 매일 시내에 나가지만 나는 집안일을 하든 콘텐츠 작업을 하든 대부분 집안이다. 아이 라이드에 아내 라이드에 대부분 집을 나서서도 차에서 나가지 않기에 사람을 만날 기회도 거의 없다. 그래서 이번에 어학 수업 가족 모임에 가면 몇몇 한국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다 기대했다. 나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너무 없다 보니 공감대를 형성할 사람이 조금 필요했다고나 할까?
‘포트락’이라고 하니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콘셉트는 자신의 문화권을 잘 드러내는 음식이라나? 뭘 해가면 좋을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가 떡볶이를 해거면 좋겠다 싶었다. 외국 아이들이니 안 맵게 간장 떡볶이를 준비하기로 했다. 아이 하교시간과 음식 준비 시간이 겹쳐 애매해서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잘 준비했다.
같은 아파트 식빵 누나 V가 (이 글 참조) 아들 T와 라이드를 부탁해서 두 가족이 함께 모임 장소로 향했다. V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우리 덕분에 알았다며 애먼 아들을 혼낸다. 음식은 마케도니아 전통 밀가루 음식과 쌀 음식을 준비했단다. 모임의 장소는 아이의 학교가 아닌 더 20분 정도 더 외곽에 있는 한 초등학교였다. 우리가 사는 곳도 시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학교에 도착하니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산속이다. 저기 경기도 어디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기업 연수원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시골에 사람이 많나 싶어 하며 행사장으로 향했는데…
앗, 사람이 많다. 정말 많다. 더 놀라운 건 한국인들이 정말 많았다. 어학 수업 가족 모임이니 모두 외국인이긴 하지만 그중 4-50% 정도가 한국인이었다. 주재원 많은 동네라던 소문의 실체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음식들은 더 놀라웠다. 김밥에 유부초밥에 불고기 제육까지, 이상하리만치 정갈하게 준비된 한국 음식들이 정말 많았다.
뭐지? 뭐지?
묘하게 한걸음 물러나게 된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을 조금 만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면서 왔는데 바글바글한 동양 외모의 사람들과 토씨하나 귀에 탁탁 박히는 한국어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게 한다.
아내와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안면을 트는 대신, 함께 간 식빵 누나와 두 시간 가까이 영어로 수다를 떨었다. (이 수다에서 들은 엄청난 이야기들은 다음 글의 주제다)
난 왜 뒤로 물러섰을까?
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은 우리 가정이 겪는 여러 일들을 함께 이야기 나누며 공감해 줄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지내던 것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일상과 변화에서 오는 괴리를 함께 나눌 사람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었다. 장소만 미국의 동부 어느 외곽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뿐, 그냥 한국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과 그 분위기가 완전히 똑같았다.
정갈하게 차려진 한국음식들은 누가 봐도 엄마들끼리의 경쟁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느낌의 정갈함이 아니다. 뭔가 비주얼을 봤을 때 ‘아이를 사랑하는 학부모의 정성’을 표현한 인위적 작품 느낌이랄까? 세팅된 머리와 꾸안꾸 명품 의상, 가방은 덤이다. 남자들 사이에선 회사와 직급, 주재원 연차 등을 통해 암묵적 줄 세우기 대화가 이어지거나, 의도적인 업무 대화를 통한 계급 과시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주재원으로 머물고 있으니 그들의 삶은 이곳보다는 한국에 더 많은 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늘 살았던 모습대로 행동했을 뿐일 거다. 한국에선 그런 모습이 일종의 생존 수단이니까. 다만, 나도 그 사람들처럼 나만의 생존 전략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나눌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이 아니었을 뿐이다. 또 막연하게 함부로 나 스스로 편견을 가지고 나 스스로 너무 다르다고 단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한국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니, 괜히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국식 경쟁사회를 피하고 싶은 나로서는 선뜻 말을 섞는 것이 두렵다. 나이가 들어 외국 생활을 다시 시작하니 관계를 맺어감에 있어 멈칫멈칫하게 된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선입견 없이 생활을 공유할 좋은 이웃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Photo by Devi Puspita Amartha Yahy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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