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미국 대학원 박사 지원이 진행되면서 아내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십 수개, 어떤 지원자들은 수십 개의 학교에 지원한다고 하니, 너무 적은 학교에 지원하는 것은 아닌지, 만약 다 떨어져 버리면 우리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나 보다. 그래서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앞선 글에서처럼 수많은 학교에 폭풍 지원에 나섰다.
아내의 불안감은 아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학교 지원에 나서기 전까지는 미국 이주 준비를 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고, 워낙 자기 일은 잘하는 사람이니 어디든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지원과 결과 발표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나의 불안감도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여전히 아내의 합격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약에…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수년간에 걸쳐 별렀던 해외 이주 계획을 드디어 실행했는데, 이제 와서 실패하면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와 아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번이 해외 이주를 할 마지막 기회인데. 이번에 실패하면 더 이상 해외 이주를 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한국에 잘 정착해야 하나? 정말 최근만 생각하면 그러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잘 사는 편이 아니었지만, 감사하게도 지금 벌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잘 아끼기만 하면, 하고 싶은 것들은 하고 살 수 있었다.
과거 우리 가족은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고, 가진 것 없이 시작한 터라 자산도 없었다. 불과 몇 년 전부터야 돈이란 걸 모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사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남들만큼’ 살 수는 없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월세에서 전세, 그러다가 집을 사고 집을 넓히고. 아이는 한국 교육 환경에서 수많은 사교육 속에서 입시를 치르고.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벌어야 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내와 나 둘 다 직장에서의 전성기가 점차 저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둘 다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연봉도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사십 대 중반이 넘어가고 나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한다고들 한다. 최근 들어 4~5년 차이나는 선배들이 회사의 리더십으로 잘 정착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들을 보면 내게도 아내에게도 더 한국에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는 점점 사라져 간다.
결국 아내와 나는 한국에 남는다는 선택지를 계획에서 지우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한국에서 지금처럼 생활하는 것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환경을 바꾸는 결단이라는 것이 점차 어려워진다. 그러기에 굳이 환경을 바꾸기보다는 각자의 컴포트 존 안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 수명이 백세에 가까워지고, 경제활동도 더 늦은 나이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다들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 이모작 삼모작이라는 말이 나의 인생에 진짜로 다가오고 있음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제2의 경제활동을 안정적인 환경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굳건한 마음을 가지더라도 주변의 시선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생활을 하게 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존의 삶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활동과 새로운 일들을 해야 한다. 불필요하게 과거의 영광(?)을 돌아보면서 ‘그때가 좋았다’며 감상에 젖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 해외 생활이다.
계산해 보면 요즘은 적어도 70까지는 경제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게 어떠한 형태의 일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30년 가까이 그 일에 숙련될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니 지금 일을 바꾸거나 새로운 삶으로 나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아내의 박사 유학 도전이 좌절된다면, (플랜 B로) 다른 영어권 국가로 실무 학교 유학을 겸해 이민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새로운 일을 해야 할 거 저렴하면서도 제대로 숙련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실무 학교 유학을 가서 빠른 시일 안에 직장을 잡는 전략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내보다는 내가 공부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아내의 경우는 지금도 외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자 문제만 해결된다면 굳이 그런 교육이나 훈련 없이도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조차 여의치 않으면 (플랜 C로) 아내의 지금 회사에서 리로케이션(글로벌 기업에서 다른 나라의 지사로 업무 환경을 옮기는 것)을 신청해 보기로 했다. 아내의 회사에서는 미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중심지로 판단한 인구가 많은 몇몇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아내는 매니저로부터 종종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로의 이주를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이주가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하지만, 과거 중국 개방 시기에 많은 한국 사람들이 중국 투자와 이주로 좋은 기회를 잡았던 것처럼 그런 기회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랜 A, 혹은 B나 C도,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하며, 변화를 위해서는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런 대체 계획을 세운 후로 급격하게 찾아왔던 불안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불안했던 가장 큰 이유는 외국 나간다고 설레발치다가, 그대로 한국에 눌러앉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한국에 남는다는 상황 자체를 지워버리니, 해외 이주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해외를 나가는 것만이 해결책이냐’라는 비판을 가할 분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이주를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비판 중에 하나였다. 당연히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방법이 해결책일 수는 없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해외 이주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 삶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이자 변곡점이었을 뿐이다. 각자 가진 것이 다르고, 기회와 조건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중년에 다다르는 우리 모두에게 변곡점이자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렇게 다양한 대체 계획을 설정하면서 한국에 남는다는 생각과 경우의 수를 지워버렸다. 한층 홀가분하다. 그래도 이러한 대체 계획보다는 아내의 박사 유학 지원이 합격이라는 결과로 잘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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