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에 아파트 동호수를 안 적었다고?’
‘그럼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왜 개인정보를 정확하게 안 적어?’
‘내 정보를 다 주는 게 그렇단 말이야. 프라이버시도 몰라?’
‘그럼 학교 서류는 어떻게 받을 건데? 다 우편으로 올 텐데, 그거 받아야 할 거 아냐.’
아내는 어디에 주소를 낼 때 항상 아파트 동호수를 적지 않는다. 다른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병원에서 주소를 요구하거나, 상업적인 곳에서 요구를 받을 때면 나도 멈칫하게 된다. 하지만 아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범위가 훨씬 넓다. 아내는 이번에 대학원에 지원하면서 주소를 적을 때 아파트 동호수를 하나도 적지 않았다. 나는 사실 이런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주소라는 것은 개인 정보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어야 하기도 하고, 미국 대학원 입학 과정에서 서류나 정보를 주고받을 때, 우편이 많이 오는 편이기도 해서 주소가 틀리면 굉장히 불편하다. 그런데 아내는 모든 학교 지원서에 주소를 쓸 때 동호수를 적지 않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미국 대학교나 대학원에 지원하면 합격 통지서가 우편으로 날아온다. 불합격을 해도 우편이 오는데, 앞의 한 문장만 봐도 내가 합격했는지 불합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합격하는 경우에는 ‘I am so pleased to inform you…’로 우편이 시작하고, 불합격하는 경우에는 ‘I am deeply regret to inform you…’로 그 내용이 시작한다. 미국의 청춘 영화를 보면 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기 위해 우편을 기다리는 장면이나, 우편을 뜯어보고 실망하거나 기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메일로 합격 메일을 받았다고는 해도, 난 당연히 우편으로 합격통지서가 날아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내의 초연한 태도와는 달리 엄청 걱정을 했다.
나의 닦달에 아내는 학교에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 통화를 통해 개인 주소를 변경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리고 우편으로 혹시 보낸 것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학교는 우편으로 보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팬데믹 이후로 이메일로 모두 대체한 듯했다.
이와 동시에 또 하나 바뀐 것이 있었으니,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학교에서 발급해주는 입학 허가 서류 I-20마저 온라인으로 발급해 준다는 것이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가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비자보다 더 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I-20다. 방학 때 한국에 방문할 때도 다시 발급받아야 하고, 미국에 학생 신분으로 정식 체류를 하려면 비자보다 이 서류가 훨씬 더 중요하다. 비자는 만료되어도 I-20만 만료되지 않으면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에 내가 유학할 때는 정말 너덜너덜한 그 서류의 원본을 애지중지 보관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젠 그 서류를 PDF로 발급해 주고, 내가 직접 프린트하면 된다니, 그야말로 혁명이 아닐 수가 없다. 즉, 주소가 조금 틀린 것 정도야 큰 문제는 아닌 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내에게 설레발 떨지 말라고 구박을 많이 받았다)
합격 통지를 받고 오퍼를 수락하고 나면, 국제 학생 부서에서 입학 허가 서류 발급을 위한 각종 증빙 서류를 요청한다. 가장 중요한 증빙은 ‘미국에 와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는가’다. 보통은 학생이라면 부모님이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므로, 부모님의 은행 잔고와 같은 증빙 서류와, 부모님이 아이의 학비를 대겠다는 서약서와 같은 서류를 제출한다. 하지만, 늙은 학생인 아내와 우리 가족은 우리가 충분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사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아내는 학교에서 장학금과 연구비, 생활비, 보험료까지 모두 지원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었는데, 유학원에서는 그래도 장학금 없이도 다닐 수 있다는 재정 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내의 학교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비싼 사립학교였기 때문에 그 금액이 무척이나 컸고, 나와 아내는 정말 있는 돈 없는 돈 싹 다 끌어모아 재정 관련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가까스로 재정 서류를 마련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업로드하고 서류 발급을 기다렸다. 하지만 관련 서류를 모두 업로드하고 아내가 받은 이메일엔 서류 발급에 6주나 걸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류를 업로드한 것이 4월 말, 6주가 지나면 벌써 6월, 8월 말에 아내의 학교가 시작하니까 학기 시작이 불과 두 달 남짓 남은 시점에 허가 서류가 날아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서류가 발급되어야 비자를 신청하고, 집을 구하고, 짐을 보내고, 모든 이주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서류가 늦게 나오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그건 학교 해당 부서와의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화는 받지 않고, 이메일을 보내면 무조건 자동응답 메일만 날아왔다.
거기에 아내는 같이 입학 수속을 하는 다른 외국 친구들을 온라인을 통해 연락하고 지냈는데, 한두 명씩 서류를 받은 친구들이 생기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 학교에 어렵게 합격하고도 서류 때문에 미국에 못 가게 되는구나… 하며 영혼을 탈탈 털리는 하루하루가 지속됐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몸에서 사리가 나올 때 즈음, 아내의 메일로 서류가 도착했다!
‘이제 가는구나!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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