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드디어 오픈한 아파트 수영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영장 오픈이었지만 아이가 기침감기에 걸려 수영장을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 주초부터 아이의 기침이 잦아들어 어제부터 수영장에 가서 놀기 시작했다.
수영장 시설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한 발품을 팔지 않고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크지는 않아도 여러 시설을 잘 갖추고 있는 데다, 수질 관리도 내가 보기에는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낙엽이나 죽은(?) 벌레들이 조금 떠 다니기는 하는데, 그 양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 누가 봐도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물의 가장 깊은 곳이 5피트 정도로, 우리 딸아이와 같은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다만 안전요원이 상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모님이 아이들의 안전을 직접 책임져야 하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수영장이 위치한 곳은 아파트 단지의 너른 평지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날씨만 맑다면 일광욕을 즐기기에도 좋다. 나는 여름에 몸을 태우는 것을 좋아해서 매번 자연 태닝을 하려고 노력해 왔었는데, 이번엔 정말로 잘 태울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안 그래도 늦은 오후에 수영장에 가면 태닝을 하려는 어른들이 물에는 안 들어가고 선베드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 수영장 방문 이틀째 되는 날, 날씨는 맑고 기온도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따뜻(?)하다. 반려견 디디 산책을 마치고 아이와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같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준비물은 아이의 수영 연습을 위한 키판과 아쿠아 슈즈, 물안경, 비치 타월 등이다. 우리 건물이 수영장 길 건너편에 있어 2차선 도로를 신호등 없이 건너야 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걸어서 2~4분 거리니, 불평할 정도는 아니다.
아이는 수영장에 도착하자마자 풀 속으로 뛰어든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것 치고는 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다. 정식 수영 교습은 아니지만 생존을 위한 수영을 가르칠 수 있겠다 싶었다. 매번 수영장에 갈 때마다 수영을 20분 정도 배우고, 그다음에 자유롭게 놀기로 했다. 평소라면 배우는 시간을 무척이나 싫어했을 텐데, 수영을 배우는 것은 그렇게 싫지 않나 보다. 꽤나 진지하게 배우고 연습한다. 자유롭게 노는 시간에도 계속 수영을 시도한다. 그렇게 진지한 모습이 여간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아내도 줌 미팅이 끝났는지, 일할 거리를 잔뜩 안고 수영장으로 왔다. 아내도 계속 일광욕을 즐기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방학이 되니 학교 일이 더 바빠졌다. 방학이 되면 여유로운 생활을 할 거라는 기대는 사라져 버렸다. 아내도 나도 무척이나 아쉽다. 그래도 아파트에 수영장이 있으니, 잠깐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 좋다.
‘아빠~’
하면서 아이가 수영장 물 밖으로 나온다. 발이 아프단다. 보니,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난다. 분명 아쿠아 슈즈를 신고 수영장에 들어갔었는데, 아무래도 불편했는지, 아까부터 벗어던지고 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영장 벽의 까끌한 콘크리트 부분에 찍힌 듯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상처가 깊어 보인다. 일단 수영장에 비치된 응급 키트에서 알코올솜을 꺼내 닦아줘 보는데, 피가 계속 난다. 발톱 주변으로 피가 도는 게 혹시 발톱이 빠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피가 나는 상태에서 수영을 계속할 순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는 아무래도 감염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도 괜히 이런저런 걱정이 든다. 미국의 약국에는 간단한 처치와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는 의료센터가 있어 거기에 방문하기로 했다. 큰 걱정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괜히 놔둬서 일을 키우는 것보다는 과하다 싶게 보호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보험도 있는데… 보험 처리되겠지, 하면서…
그런데 약국의 의료센터가 예약제라 바로 진료를 보는 것이 안 됐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건너편에 병원이 있으니 거길 가보면 될 거란다. 안 그래도 길 건너 있는 병원이 어떤 곳인가 궁금했는데, 한번 가보자 했다. 보험이 있으니까. 뭐 큰일 나겠어? 하면서.
꽤나 말쑥한 느낌의 신식 건물 병원이다. 브랜드도 있는 종합 병원의 지점 같았다. 그런데 이런 병원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입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열려 있는 한 문으로 들어가서 ‘아이가 이렇게 다쳐서 조금 살펴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 직원이 이리로 오면 된단다. 그래서 들어갔다.
꽤나 좋은 시설의 병원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말 텅텅 비었다고 할까? 뭐지? 여긴? 신분증과 보험증을 보여주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불과 몇 분 만에 안에서 부른다.
알고 보니, 응급실이다. 아니, 응급실인데, 뭐 이렇게 사람이 없어? 생각하는데, 간호사 한 분이 병실로 안내한다. 크기는 6인 입원실 크기의 병실에 인클라인 베드가 달랑 하나 있다. 수많은 전자 의료기기들도 있다. 간단히(?) 키와 몸무게, 혈압을 재더니, 기다리면 ‘닥터 파텔’이 들어오실 거라면서 나간다. ‘닥터 파텔’이라니… 그래, 당연히 ‘닥터 파텔’이겠지.(미국엔 인도계 의사가 많은 편인데, 대부분의 인도 의사 성이 ‘파텔’이다. 굉장히 미드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다)
호들갑을 떨면서 병원을 찾긴 했지만, 그래도 엄지발가락이 찍혀서 피가 나서 온 건데, 이 시설은 다 무엇인가 싶었다. 아내나 나나, 또 아이도 어이가 없는지 계속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닥터 파텔’이 들어왔다. 굉장히 친절한 인도계 ‘닥터 파텔’은 일주일 전 부산으로 휴가를 다녀왔다는 폭풍 수다를 이어가며 아이의 발가락을 살핀다. (이 모습도 정말 웃기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며 간단히 소독(드레싱)하면 된단다. 그러면서 ‘드레싱’을 하는데, 어떤 약품도 없이, 심지어 알코올도 안 쓰고, 거즈에 물을 묻혀 상처 부위를 닦아낸다. 그리고는 아이의 엄지발가락에 능숙한 전문가의 손길(?)로 밴디지(?)를 붙여준다. 약도 안 바르고 그냥 물로 닦고 밴디지를 붙여준 거다.
난 실성한 듯 거의 폭소가 터졌다. 처치는 간단해도 섬세한 관리가 필요할 거라 생각한 나는 얼마 후에 다시 수영이 가능한지 물었다. 안 그래도 아이가 당분간 수영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입이 뾰로통 나왔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닥터 파텔’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오늘 당장은 좀 그렇지만… 내일?’
아, 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굉장한 호들갑을 떨었구나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수납을 하기 전까지는.
‘125불?’
그렇다. 응급실. 미국에서 의료 비용은 악명이 높지. 꽤나 퀄리티 좋은 보험이 있지만, 응급실은 코페이(자기 부담금)를 해야 한다. ‘발가락 피난 거 닦고 밴디지 붙인 비용’은 125불(자기 부담금)+얼마(정확히 모름, 보험 처리 비용)인 거다. 어이가 없어하는 나와 아내를 보면서 수납 직원이 이거라도 챙겨 가라면서 200ml짜리 물 세 개를 건네준다.
그래. 마음의 안정을 주는데 쓴 비용이라고 생각하자. 만약 병원에 안 갔으면 며칠을 혹시 감염될까 걱정하면서 보냈을 테니.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보험이 있으면 다 처리될 줄 알았기에 간 거였지만, 만약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틀린 정보로 나중에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을 거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내 모습과 비교해서 내가 많이 안정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십 년 전에 미국에 있을 때는 의료비 5~60불에 한숨 쉬고 손을 벌벌 떨고 그랬다. 평소에 얼마나 또 아껴야 하나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그런 내 성향을 아는 아내는 청구서를 받아 들고는 내 눈치를 봤다. 워낙 작은 돈에 손을 벌벌 떨며, 쪼잔이 성격을 드러냈던 터라, 나의 옛 자아가 등장할 세라 전전긍긍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저 ‘인생 수업’ 일 거니, 하며 허허 넘길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당황한 아내를 괜찮다 토닥일 정도는 되었다. 돈이 많아서는 아니다. 그 정도의 돈 때문에 큰일이 나제 않는다는 사실을 십 년이 넘게 지나서야 깨달았나 보다. 어차피 진짜 큰일이 나면 그 정도 돈은 문제도 아니고 그 돈이 더 있어서 막을 수 있지도 않다.
오히려 반대로 아이 발가락에 피난 거로 응급실 찾아오는 극성 한국 엄마 아빠의 모습을 이 동네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아닌가 싶어 살짝 민망하다. 에이, 그럼 어떤가? 어찌 되었건 아이는 괜찮고 우린 안심했으니 되었다. 외식 한 번 안 하면 되지 뭐.
Photo by Martha Dominguez de Gouvei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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