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여름방학이 시작한 지도 2주가 지났다. 6월이 시작하자마자 시작한 아이의 여름방학은 8월 말이 되어야만 끝나는데 이제 겨우 2주라니, 앞 날이 깜깜하다.
슬프게도, 아내는 방학이 되자 더 바빠졌다. 수업을 핑계로 속도가 나지 않던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아내가 꼭 참석하고 싶은 학회가 있는데, 그 학회에 연구 논문을 제출하는 기한이 이번 7월까지다. 불과 한 달여가 남은 기간 동안 아내는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학기 중엔 일주일에 두세 번 학교에 갔는데, 정작 방학이 되자 매일 학교에 간다. 아내의 연구는 응원하지만, 난 이번 여름방학, 독박육아다. 아니, 애가 컸으니 육아는 아니다. 독박양육이다.
방학이니 늦잠이라도 자면 좋으련만, 오히려 학기 중보다 일찍 일어난다. 아침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일어난 아이는 스스로 자기 아침을 챙겨 먹고 티브이를 본다. 요즈음엔 드래곤에 잔뜩 빠져서는 넷플릭스에서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들을 정주행 하고 있다. 극장판뿐 아니라, 티브이 시리즈까지 섭렵했다. 하루 동안 티브이 시청으로 아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이다. 아침 여덟 시가 되면 한 시간은 다 없어져 버린다.
티브이를 다 보고 나면 세수하고 양치를 한 뒤에 방학 숙제를 한다. 어… 내가 시킨 적은 없다. 자신이 직접 만든 방학계획표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원형 시간표다. 아직 아이에겐 한국식 교육과 미국식 교육이 섞여 있다) 스스로 방학 숙제를 적어 넣었다. 난 그저 ‘네가 적었으니, 네가 지켜라’ 정도만 훈육한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새 학년이 시작되니, 새 학년 학업에 적응할 수 있도록 수학에 대해서만 트랜지션 북을 숙제처럼 내줬다. 거기에 ESL 학생들을 대상으론 방학 동안 영어를 꾸준히 쓸 수 있도록 별도의 워크북도 줬다. 뭐, 어떤 강요도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아이는 해야 한다고 느끼면 곧잘 하는 편이다. 시키지 않아도 홀로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있는 뒤통수를 보면 여간 대견한 게 아니다.
함정은, 숙제를 마쳐도 아직 아침 아홉 시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숙제를 마친 딸아이는 태블릿 피씨 게임을 시작한다. 철저하게 앱스토어의 권장연령을 지켜 게임을 다운로드하여하는데, 때로는 아이로부터 원망 섞인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단 한 번도 허용한 적이 없어서, 불평 외에 더 이상은 없다. 주로 색칠 게임이나 추리 게임, 혹은 리듬게임을 즐기는 편이다.
태블릿 게임은 짧게만 허용한다. 아무래도 개인 디바이스를 오래 사용하면 몰입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대신 콘솔 게임은 오히려 길게 허용한다. 얼마 전엔 게임 스토어에서 ‘드래곤 길들이기‘ 게임을 구매해 한창 하더니, 최근에는 다시 닌텐도의 '동물의 숲‘으로 돌아갔다. 닌텐도 스위치는 휴대용 게임기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가급적이면 티브이를 통해서만 플레이하도록 교육한다. 확신하건대 개인 디바이스 화면보단 티브이가 시력에 더 낫다. 티브이 시청이 시력에 좋지 않다는 건 브라운관 시절에 국한한 현대의 미신에 가깝다. 차라리 휴대폰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에게 주어진 미디어 사용 시간인 티브이 시청, 태블릿 피씨 게임, 콘솔 게임 사용 시간을 다 마치고 난 뒤에도 고작 열한 시, 열두 시다. 하루가 얼마나 긴데, 이제 점심시간인 거다.
식사를 하고 나면 한 시 이후부터 세 시 정도까진 무얼 하든 상관없다. 다만 티브이도 게임도 없다. 아이는 이 두 시간이 아주 힘이 든 듯싶다. 그림을 그리거나 유튜브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는데, 다른 건 다 지겨워졌는지 주로 책을 읽는다. (의외의 독서 효과에 남몰래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최근 몇 개월간 아이가 읽는 책은 ‘윙즈 오브 파이어‘라는 판타지 소설이다. 이 책 덕분에 아이가 드래곤에 푹 빠져 버렸다. 학기가 끝나기 직전 15권의 시리즈를 모두 끝내 버렸는데, 방학이 시작하고 나서는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고 하고 있다. (1년 전까지는 영어 읽기가 불가능했던 아이가 제법 두꺼운 판타지 소설을 반년만에 다 읽어냈다. 놀랍다) 다른 책을 사준다고 해도 시큰둥하고 계속 읽었던 책만 다시 읽는다.
그 사이 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개인 작업을 한다. 주로 유튜브 영상 제작을 하는데, 아무래도 아이가 집에 있으니 집중이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래도 3시가 되면 작업을 끊는다. 아이 홀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내의 잔소리가 무섭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시간을 3시로 정한 이유는 그 시간이 반려견 산책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It’s the law!) 아이와 함께 반려견 디디 산책을 나간다. 날씨는 제법 더운 시간이지만, 하루 종일 집에만 있던 디디나 딸아이 모두 잠깐 산책하기 좋은 시간이다. 땀을 빼면 더욱 좋다. 다음 일정 때문이다.
디디 산책을 마치고 나면 날씨가 허락하는 한 수영장에 간다. 아파트 어매니티인 수영장은 비만 안 오고 너무 춥지 않고 공기가 나쁘지 않으면 (요새 캐나다 산불 연기 때문에 공기가 썩 좋지 않다) 아이와 함께 간다. 평일엔 사람이 많지 않다. 그 시간이 어른들 퇴근하기 직전 시간이기도 해서 한적하고 좋다. 너무 찌는 듯 덥지도 않아 물놀이를 즐기기엔 제격이다. 대신 거의 매일 가니까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한 시간 반 정도? 그 정도면 하루 재밌게 놀았다 싶다. 수영을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이젠 제법 혼자 수영을 할 수 있어 (개헤엄이다) 아이가 원할 때를 뻬고는 난 선베드에서 태닝을 도전한다. 서양에서 느끼기에 한국인의 피부는 너무 하얗고, 특히 내가 그런 피부를 싫어한다. 이번 여름 짙게 그을른 피부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수영장에서 돌아오면 5시 반 정도다. 저녁을 해야 한다. 아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내가 저녁을 하고 있으면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버스를 갈아타면서 한 시간 반에 가까운 투어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통에 아내는 녹초가 되어 있다. 그래도 저녁은 함께 둘러앉아 먹을 수 있어 좋다.
밥 먹고 설거지하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세척기의 도움을 받는다. 전기세 아까워 매일은 못 쓴다) 그러고 나면 하루의 일과는 거의 마무리다. 일주일에 세 번 피트니스 운동을 하러 가는데, 방학이라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후다닥 돌아와 디디 산책을 또 시켜야 한다. 디디 산책까지 시키면 진짜 해야 할 일은 다 끝난 거다.
9시 반쯤 아이 잠들기 전 기도해 주고 재우고 나면 이젠 자유시간이지만, 가급적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한다. 신혼 초부터 밤에 깨어 있으면 야식을 먹어 살이 많이 쪘었다. 일찍 자는 게 살 빼는 지름길이다.
아이의 첫 미국 여름방학.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딸과 하루 종일 비비적대며 지내는 게 두 주간 반복되니 앞 날이 깜깜하지만, 대음주는 구세주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여름 캠프다. 비록 반나절이지만 아이와 나를 조금이나마 해방시켜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 중이다.
Photo by Joe Pizzi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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