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의 어느 봄날, 그렇게 떠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꾼 다음 날, 아내는 덜컥 유학원에 거액을 지불했다.
‘얼마라고?’
‘ㅇ백만 원’
원래의 나였다면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다. 그 돈을 내지 않아도 지원할 수 있는데. 그 돈 말고도 원서비가 얼마나 비싼데. 그 사람들이 합격시켜주는 것도 아닌데.
난 원래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한다는 것,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실,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한 계단이라도 높은 사다리의 대학을 보내기 위해, 나의 꿈과 진로 따윈 무시한 채 모 학과를 강요했고, 부모는 자신의 가업을 잇게 하기 위해, 문과인 나에게 모 공학과를 강요했다.
왕 고집인 나는 그들의 강요와 바람을 뒤로한 채, 방송을 업으로 삼기 위한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했고, 이 선택과 함께 어른들의 도움과 지원은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도 취업과 유학, 그리고 귀국까지 어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는 늘 도움을 빙자해 당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가스 라이팅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의도를 피하기 위해 도움 요청하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도움을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잘했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나이 사십을 넘어서, 회사의 지원이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박사과정에 도전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앞서 간 사람이 있어야 그것을 보면서 따라 할 텐데, 비슷한 사람들도 찾기 어려웠다. 그만큼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런 선택은 잘하지 않는다. 모두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사실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유학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기도 했지만.) 거액의 연봉을 받지는 않았지만, 스스로에겐 만족스러웠다. 십여 년의 경력이 쌓이다 보니, 일에서의 어려움도 점차 줄어들고, 안달복달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고, 말귀를 알아들으니 육아도 교육도 한결 수월해졌다. 지금이 참 좋다고나 할까? 이런 시기에 누가 삶에 변화를 줄 용기를 가지겠는가? 지금 좋은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결정을 했고, 이걸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아내의 눈물겨운 유학 준비생의 삶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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